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·순천 10.19 사건 (문단 편집) == 당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및 진압군의 증언 == ||민중 600여 명이 집결해 가지고서 여수의 병영을 향해서 돌입해 오고 총 소리가 나자마자 벌써 '''기게대(旗揭臺)에 올라가 서 인민공화국기를 걸어 놓고 공산주의에 대한''' '''사상의 찬양을 부르짖으며 연설을 하며''' 나오는 이 조직적 상태는 여수의 면모만을 보고서만 말 할 것이 아니라 순천 보성 등지에서 반군이 나기전에 여기저기에 무기 준비, 쌀 몇 가마, 인민해방군을 환영한다고 하는 깃발, 인민공화국의 기, 그 발동 시의 대열 이것이 전부 다 조직되고...(중략) '''16, 7세된 놈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고 고식총(古式銃)을 들고 사격하는데''' '''이것이 대항력이 제일 강하며 열광적이였다고 그래요.''' 여기에 교수 놈들이 영도하고 여수의 반란군이 민중을 총 연합지휘 하는 최고사령관은 여수 여중학교의 교장이던 자이고 지금 그 자는 아마 잡혔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었을 것입니다."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본회의 당시 국방부장관 [[이범석]]의 보고|| ||반란군이 보성의 한국민주당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원 우익진영과 유지 40명을 총살한 것이있습니다. 또 순천에서 일어난 사실에 있어서 지금 일반적인 얘기는 '''순천에서만 2000여명이 학살당하였다고''' '''그러지만 경찰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완전한 수효는 알 수 없읍니다.'''(중략) 경찰조사에 보면 '''학살된 경찰관만 324명입니다.''' 거기에 이름난 감찰관(監察官)이 여섯입니다. 가령 광주에서 급 보고를 듣고 무기와 탄약을 싫고 아까 국방부장관이 말씀한 바와 같이 정신없이 갔다가 부뜰려서 목포서장 그러고 경찰관이 죽었읍니다. 그 죽이는 데에는 '''몸에다가 기름을 뿌려서 불을 살리고 허리를 둘로 베고 몇을 베었읍니다.''' 그 외에 순천서장 역시 그렇고 또 사법주임과 각 네 주임이 그랬읍니다. 순천에서 사진을 가지고 왔지만 300여 명의 경찰관이 인민재판에 의해서 총살한 것 은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살해한 것이그대로 있읍니다.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본회의 당시 내무부장관 [[윤치영]]의 보고|| ||"핵심 세포조직 40여명은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여 비상 나팔을 10월 19일 오후 8시에 울리자 출동사병들은 출발시호인줄 알고 지체 없이 연병장에 집합하여 실탄지급을 받고 난 뒤 지창수 상사는 병사들의 반(反) 경찰 감정을 교묘히 자극하면서 허위사실을 유혹하고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." 당시 예비역 대령 김형운의 증언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